신군부의 권력 장악 본격화… ‘K-공작계획’과 정보 권력 독점의 서막
1980년 2월, '서울의 봄' 이면에 숨겨진 그림자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후, 대한민국은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의 기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대학가와 시민사회는 새로운 헌법과 민주적인 선거를 요구했고, 표면적으로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하에서 온건한 정치 일정이 진행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12·12 군사반란으로 이미 군권을 완전히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신군부 세력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에게 '민주화'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였습니다. 1980년 2월에 접어들며, 신군부는 군 내부의 숙군(肅軍) 작업을 어느 정도 마무리 짓고 시선을 민간 정치권과 대한민국 전체로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군복을 입은 채 국가의 모든 정보와 언론을 통제하려 했던, 소리 없는 권력 찬탈의 본격적인 서막이 열린 달이 바로 1980년 2월이었습니다.
2. 정보의 단일화: 보안사와 중앙정보부의 기형적 만남
신군부가 민간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정보(Information)'였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군 정보를 총괄하는 육군 보안사령부와 국내외 민간 정보를 총괄하는 국가 최고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중정)가 존재했습니다. 12·12 반란으로 보안사는 손에 넣었지만, 방대한 민간 조직과 자금을 움직이는 중앙정보부는 아직 신군부의 완벽한 수중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1980년 2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초법적인 구상을 구체화합니다. 바로 자신이 중앙정보부장의 자리를 겸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현역 군인이 국가 최고 민간 정보기관의 수장을 맡지 못하게 되어 있는 당시 법질서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발상이었습니다.
신군부는 2월부터 내부적으로 중앙정보부 개편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중정 내부의 호의적인 인물들을 포섭하고, 기존 박정희 정권 시절의 핵심 인물들을 배제하면서 조직을 무력화시켰습니다. 군 정보와 민간 정보라는 대한민국의 양대 정보·수사 권력을 한 사람의 손에 쥐어주기 위한 징검다리가 이 시기에 치밀하게 놓였습니다. (※ 이 은밀한 사전 작업을 바탕으로 전두환은 두 달 뒤인 1980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 직무를 공식 겸임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완성하게 됩니다.)
3. 국민의 눈과 귀를 가려라: 언론 조작의 마스터플랜 ‘K-공작계획’
정보 권력을 손에 쥔 신군부에게 남은 가장 큰 걸림돌은 ‘언론’이었습니다. 언론이 신군부의 군사반란 행위나 권력 장악 움직임을 폭로하고 비판한다면 국민적인 저항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1980년 2월, 보안사령부 정보처(처장 권정달)를 중심으로 극비리에 여론 조작 및 언론인 포섭을 위한 태스크포스가 구성되었습니다. 이것이 현대사에 큰 오점을 남긴 ‘K-공작계획’(King 공작계획)의 시작이었습니다. 여기서 'K'는 대한민국 권력의 정점, 즉 '왕(King)'을 뜻하는 것으로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신군부의 최종 목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명칭이었습니다.
2월부터 기획되어 전개된 K-공작계획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이 철저하게 반민주적이었습니다.
언론인 성향 분석 및 등급 분류: 국내 주요 신문사, 방송사의 발행인, 편집국장부터 일선 기자들까지 사상과 성향을 조사하여 친(親)신군부, 중립, 반(反)신군부 성향으로 등급을 매겼습니다.
회유와 협박: 친신군부 성향의 언론인에게는 촌지와 향응을 제공하며 신군부의 거사(집권) 정당성을 홍보하도록 유도했고, 비판적인 언론인에게는 계엄법을 무기로 강제 해직과 구속 등의 보복을 준비했습니다.
보도 검열의 상시화: 이미 시행 중이던 비상계엄을 핑계로 신문 인쇄 전 검열관들이 상주하며 신군부에 조금이라도 불리한 기사는 먹칠을 하거나 가위로 오려내는 등 언론의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4. 무너진 헌정 질서와 다가오는 5월의 비극
1980년 2월 한 달 동안 은밀하고 신속하게 진행된 신군부의 행보는 단순한 군부 내의 기강 확립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국가 체제를 군사독재로 되돌리기 위한 치밀한 사전 정계 개편이자, 국민을 기만하기 위한 공작 정치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이들의 서슬 퍼런 기세와 정보 독점 앞에 사실상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있었고, 내각 역시 신군부의 통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는 '민주화 일정이 차질 없이 진행 중'이라는 정부의 발표가 이어졌지만, 실상은 2월의 음모를 바탕으로 신군부의 권력 기반이 콘크리트처럼 굳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시기의 정보 독점과 언론 장악은 결국 3달 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유혈 진압한 '5·18 민주화운동'과 제5공화국 출범이라는 대한민국 현대사 최고의 비극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 |
| 5·18 민주화운동 |
5. 마무리하며: 역사적 팩트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
1980년 2월의 기록은 사각의 링 밖에서, 대중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국가의 숨통을 조여 갔던 신군부의 치밀함을 보여줍니다. 정보의 독점과 언론의 통제가 가져오는 결말이 얼마나 참혹한지, 대한민국 현대사는 이 2월의 기록을 통해 뼈저리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터넷의 수많은 정보 속에서 이 차가운 역사적 사실을 다시 찾아내고 기록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감추려 했던 권력의 음모를 팩트로서 명백히 밝혀내고, 다시는 이러한 초법적 기만행위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시민사회의 눈을 깨워두기 위함입니다. '서울의 봄'을 무참히 짓밟았던 1980년 2월의 숨은 움직임들을, 우리는 왜곡 없는 온전한 역사의 기록으로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에 의해 기억됩니다." 더 많은 영상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가슴 뭉클한 그때 그 시절의 기록
오늘의 핫한 소식이 더 궁금하시다면?
.png)




.png)
.png)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