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3월 초, 해태제과 여성 노동자들 ‘인간다운 삶’을 향한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하다

 



오늘날 우리에게 '하루 8시간 근무'는 당연한 법적 권리이자 일상의 상식입니다. 하지만 이 평범한 권리가 현장에 정착되기까지, 과거 수많은 노동자의 헌신과 처절한 투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인 1980년 3월 3일 월요일,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의 해태제과 공장에서는 한국 노동운동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위대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회사 측과의 치열한 공방 끝에 전면적인 '1일 8시간 노동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노동자들이 개정된 노동 조건으로 첫 정상 출근을 맞이한 날이었습니다.

엄혹했던 시대적 그늘 속에서, 오직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거대한 자본과 압박을 이겨낸 그날의 기록을 사실에 근거하여 재조명합니다.


1. ‘곱빼기 노동’과 밤샘의 일상: 당시 해태제과 공장의 현실

1945년 설립된 해태제과는 1970년대 말 기준, 종업원 3,000명이 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제과업체 중 하나였습니다. 달콤한 과자와 껌, 캐러멜을 생산하며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기업이었지만, 그 달콤함 뒤에는 공장을 가득 채운 여성 노동자들의 눈물과 고통이 은폐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전체 사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여성 노동자들은 극심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당시 근로기준법상 하루 노동시간은 8시간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나, 이는 현장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 명목상의 규정에 불과했습니다. 공장은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기본 12시간 노동을 요구하기 일쑤였고, 성수기나 주문량이 밀릴 때에는 이른바 '곱빼기 노동'이라 불리는 14시간에서 최대 18시간에 달하는 살인적인 밤샘 노동이 일상적으로 자행되었습니다.

일주일에 단 하루 주어지는 휴일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제대로 쉬지 못해 늘 피로에 찌든 노동자들은 작업 중 기계에 신체가 감기는 안전사고에 상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손에 쥐는 임금은 매우 낮았으며, 관리자들의 고압적인 태도와 남성 중심적 통제 질서 앞에 개인의 저항은 무력하기만 했습니다.



2. "법대로 8시간만 일하겠다": 준법투쟁의 서막

시간이 흐르면서 노동자들은 영등포산업선교회 등 외부 노동 교육과 소모임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자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가가 제정한 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코 부당한 일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현장 깊숙이 확산된 것입니다.

1979년 7월, 마침내 해태제과 비스킷 부서의 노동자들이 먼저 행동에 나섰습니다. 이들은 회사가 정한 무리한 도급제 개편에 반대하며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대로 하루 8시간만 일하고 퇴근하겠다"는 이른바 '준법투쟁'을 선언했습니다.

[해태제과 노동자들의 핵심 요구 사항]
1. 하루 12시간 이상의 살인적인 '곱빼기 노동'을 철폐하라.
2.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1일 8시간 노동제를 전면 실시하라.
3. 일주일에 최소 하루의 유급 휴일을 보장하라.
4.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부당한 임금 삭감을 방지하라.

비스킷 부에서 시작된 8시간 퇴근 투쟁은 순식간에 캔디 부, 캐러멜 부로 옮겨붙었습니다. 투쟁에 동참한 인원은 순식간에 수백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오후 4시가 되면 일제히 기계를 멈추고 공장 문을 나서는 여성 노동자들의 행렬은 회사 측에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했습니다.



3. 탄압과 공권력의 개입을 견뎌낸 9개월의 시간

회사는 순순히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회유책을 썼으나, 노동자들의 의지가 꺾이지 않자 점차 강경한 대응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참여 노동자들의 회고와 노동운동 사료에 따르면, 남자 관리자들을 동원해 오후 4시에 퇴근하려는 여성 노동자들의 앞을 물리적으로 가로막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공장 문을 걸어 잠그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는 노동자들이 발생했습니다. 심지어 투쟁을 주도하던 대의원을 골방에 격리한 채 사표 제출을 압박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사료는 전합니다.


 

공안당국 역시 이 움직임을 예의주시했습니다. 정부와 공안당국은 해태제과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 주장을 ‘외부세력 개입’ 가능성으로 의심하며 특별조사에 착수하는 등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했습니다.

회사는 핵심 주동자로 지목된 노동자들을 부당 해고하는 방식으로 대응했습니다. 압박이 거세지면서 초기에 수백 명에 달했던 동참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남은 노동자들은 매일같이 가해지는 고립과 해고의 위협 속에서도 기계를 멈추고 8시간만 일하는 투쟁을 9개월 동안 완강하게 이어갔습니다.



4. 1980년 3월: 마침내 이뤄낸 이정표와 전파 효과

끝 보이지 않던 대립 속에서 마침내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이 종교계, 시민사회단체 등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사회적 여론이 형성되었고, 1979년 8월 하순에는 해태제과 경영진이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당국의 조사를 받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해를 넘긴 1980년 2월 말, 회사 측은 전격적으로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공장의 각 현장 관리자들은 조회를 통해 다음과 같이 공식 발표했습니다.

"3월 1일과 2일(일요일) 휴무를 거쳐, 월요일인 3월 3일부터 전 공장에 걸쳐 1일 8시간 노동제를 전면 시행합니다."

이는 당시 노동운동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성과로 평가받았습니다. 단순히 노동시간이 단축된 것뿐만 아니라, 가장 민감한 문제였던 임금 감소를 방지하기 위해 실질적인 임금 보전 조치(기본급 및 수당 조정)까지 이끌어내며 노동자 측이 핵심 요구를 상당 부분 관철한 보기 드문 사례였습니다.


 

해태제과 노동자들의 결실은 단일 사업장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사례에 고무된 화학노련 산하의 다른 대형 식품업계(롯데, 동양제과 등) 노동자들도 연쇄적으로 1일 8시간 노동제 도입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고 나섰고, 이는 전 식품산업계로 정상적인 근무 체제가 확산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5. 역사적 맥락: 1970년대 여성 노동의 현실과 연결고리

해태제과 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지 한 기업의 노동조건 개선 요구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는 1970년대 후반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 그늘에 가려져 있던 여성 노동자들의 처참한 현실과 누적된 분노가 폭발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시기적으로 YH무역 사건(1979년 8월) 등 여성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생존권 투쟁이 전국을 뒤흔들고 있었으며, 영등포산업선교회 등의 지원 아래 노동자들의 권리 의식이 눈을 뜨던 시점이었습니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 이른바 '서울의 봄'으로 불리는 신군부 집권 전 짧은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해태제과 여공들은 자본의 핵심 통제 수단이었던 '시간 체제'에 정면으로 저항하여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정권의 억압 속에서도 끊이지 않고 이어져, 훗날 1980년대 민주노조 운동의 중요한 선례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6. 에필로그: 그날의 용기가 남긴 유산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정시 퇴근과 휴식의 권리, 그리고 노동 이후의 소중한 일상 시간은 1979년과 1980년의 교차점에서 온몸으로 공장의 부당한 압박에 맞섰던 해태제과 여성 노동자들의 용기에서 빚어진 역사적 유산입니다.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에 의해 기억됩니다." 더 많은 영상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가슴 뭉클한 그때 그 시절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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