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군사 반란의 마침표, 최규하 대통령의 ‘사후 승인’과 무너진 헌정 질서


 


1. 1979년 12월 12일 밤, 총리공관의 대치

1979년 12월 12일 저녁,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과 동시에 삼청동 총리공관에 머물던 최규하 대통령(당시 취임 전 권한대행 상태)을 찾아갔습니다. 목적은 하나, 총장 연행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승인)'를 받아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규하 대통령은 "국방부 장관과 협의하라"며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이는 군 통수권자로서 절차적 정당성을 지키려 했던 최소한의 저항이었습니다.


최규하 대통령

 


2. 9시간의 압박, 그리고 국방부 장관의 등장

신군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통령을 포위하고 반복해서 재가를 요구하는 한편, 행방이 묘연했던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뒤쫓았습니다.

  • 장관의 행방: 노재현 장관은 총격전 발생 후 미 8군 사령부 등으로 피신해 있다가, 13일 새벽 신군부에 의해 발견되어 총리공관으로 압송되었습니다.

  • 무력 앞의 굴복: 이미 서울의 주요 거점이 신군부에 점령된 상태에서, 노재현 장관은 신군부의 요구대로 총장 연행 재가서에 서명할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게 됩니다.




3. 12월 13일 새벽 5시 10분, ‘사후 승인’의 기록

결국 최규하 대통령은 13일 새벽 5시 10분경, 정승화 총장 연행 재가 서류에 서명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역사적 증거가 남습니다.

대통령은 서명 옆에 '12월 13일 오전 5시 10분'이라는 시간을 명확히 기록했습니다. 이는 정승화 총장이 연행된 지 이미 약 10시간이 지난 시점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 사건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명백한 군사 반란'이었음을 역사에 남기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영화 - 서울의 봄


4. 신군부의 권력 장악과 그 의미

대통령의 사후 승인이 떨어지자마자 신군부는 기다렸다는 듯 모든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1. 지휘체계 붕괴: 정승화 총장 등 기존 육군 지휘부는 무력화되었고, 신군부 인물들이 군의 요직을 차지했습니다.

  2. 권력 찬탈의 서막: 12.12 군사 반란은 단순한 군 내부 하극상을 넘어, 민간 정부를 무력화하고 신군부가 정치 전면에 등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3. 법적 심판: 훗날 1997년 대법원은 이 '사후 승인'이 강압에 의한 것이었음을 인정하며, 12.12를 '군사 반란'으로 확정 판결했습니다.






5. 마무리하며: 기록이 증명하는 진실

"재가할 수 없다"는 대통령의 거부가 "사후 승인"으로 바뀌기까지 걸린 9시간. 그 짧은 시간 동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긴 잠에 들어야 했습니다.

대통령이 서류 옆에 남긴 '새벽 5시 10분'이라는 숫자는, 비록 무력 앞에 굴복했을지언정 무엇이 진실인지를 후대에 알리려 했던 역사의 흔적입니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을 기록하며,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헌정 질서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에 의해 기억됩니다." 더 많은 영상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가슴 뭉클한 그때 그 시절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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